나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고작 그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 몰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생각은 굉장히 오래 전부터 해왔다.
‘나이주의’라는 개념을 접하고, 그렇게 낡은 관습을 깨려고 노력한 세월이 상당히 길다. 나는 내가 서른이 되는 순간에는 별 생각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나는 한국나이 스물아홉이 되는 순간부터, 점점 연말이 다가올 수록 지난 20대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혼란과 고비가 있었다. 가장 큰 고비는 스물여덟 무렵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그냥 나의 옹고집과 오기, 그리고 주변에서 비롯된 천운이 맞물려 극복하면서 지금이 되었다.
그렇게 큰 일을 넘기고 나니까 내가 아주 오랜 시간을 어쩌면 우울, 무기력, 불안, 강박과 같이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들을 모두 갖고 어영부영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세월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잘 견뎌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뿌듯하긴 하다.
요즘 학교에서 듣는 교양과목으로 ‘행복심리’라는 수업이 있다. 듣다보면 내가 정말 마음을 좁히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누구나 살다보면 힘든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을 그나마 가뿐하게 넘기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내게는 그런 지혜가 부족했다.
이번 계엄 사태로 인해 전국의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그러한 분노와 절망을 집회현장에서만큼은 응원봉을 흔들며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누구나 삶에 있어서 ‘해학’이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백예린의 안티프리즈(Antifreeze)라는 곡에는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라는 가사가 있다. 이따금 곱씹던 가사이긴 했는데, 요새 유독 이 노래 가사가 자주 떠오른다.
나는 분명,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무기력한 20대를 지나며 나름대로 그 속에서도 충분히 홀로서기에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나의 30대는 지난날의 실패를 딛고 올라설 차례다. 고작 앞자리 바뀌는 게 뭐라고 이렇게 비장해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