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잠기는 공간

생각의 강에 댐을 쌓지 말자. 바다와 만나는 길을 막지 마라.


떠나고 싶지 않았던 도시, 그러나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

나는 지금 부산에 살고 있다. 토박이는 아니고, 인근 지역 출신은 더더욱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곳에 왔지만, 사실은 잠시 머물다 가기로 했었다.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흐르면서 나는 이곳에 평생 살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독립을 해도 부산에서 했고, 어려서부터 지리에 빠삭했던 덕분에 부산, 경남을 토박이보다 훨씬 잘 알게 되었다.

지금은 중장년층 어른들의 뚜렷한 부산말을 잘 알아들으며, 가끔은 내 말투도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고, 심지어 타지에서 방문한 일행들의 사투리 통역가를 자처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많은 이들로부터 ‘서울 사람’으로 통하지만, 영락 없는 부산 사람인 것이다.

누구보다 여러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나는 지역사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그래서 부산시와 관련한 여러 사업들에 시민 참여의 장이 열리면 그것이 보여주기식이라는 의심을 갖더라도 일단 동참했었다. 지방선거도 빠짐없이 투표했던 나는 요즘 몇 년 동안 “이대로 부산에 남아도 되는걸까?” 하는 물음을 꾸준히 던지고 있는 중이다.

부산의 청년 인구는 10년째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제 이런 말은 식상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부울경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이를 모르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지겹게 하는 말이다. 실제로 2014년 352만 명을 기록한 부산시 전체 인구가 2015년에는 5천 명이 감소한 351만 명 가량으로 집계되었고, 그 다음부터 해를 거듭할 수록 급격하게 줄어들어왔다. 그로부터 2025년 현재, 부산시 인구는 326만 명으로 나타났다. 불과 11년 사이에 25만 명의 인구가 빠져나갔다. 심지어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에 339만 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지금까지 5년 사이에 무려 13만 명이나 부산을 떠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단순히 집값이 비싸지고 주변 교통이 좋아지면서 부산에서 경남, 울산으로 인구가 빠져나갔다는 식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인구가 이동하는 현상은 산업화 이후로 당연하게 있어왔지만, 그럼에도 부산에서는 나름 양산, 김해 등으로 빠져나가는 인구가 제법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부산, 울산, 경남 모두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을 겪고 있고, 떠나간 인구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보면 모두가 수도권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모두가 그저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지역을 떠나고 있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인구유출을 막지 못한 무능한 지역정치

지역정치의 무능함을 탓하기 전에, 지금껏 우리가 서울을 ‘중앙’으로 삼고, 모든 언론사의 보도 순서는 서울의 소식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보도해왔으며 인구수를 기준으로 나눈 국회의원 선거구 탓에 국회의사당의 지역구 의석 중 무려 절반이 수도권 시민들을 대표한다. 드라마를 포함한 미디어 전반이 서울의 방송국에서 생산되며, 그곳에서 비수도권의 대부분은 그저 수도권 사람들의 여행지 또는 출장지일 뿐이라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심어왔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근본적인 구조 자체가 틀려먹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지역 정치인들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이나 해보았을까? 그저 전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진 만큼 더 많은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특히 경상도 특유의 ‘우리가 남이가’ 정신을 부추기는 야만의 시대를 기어코 연장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런 ‘꼰대’들이 지역정치를 장악하고 있으니, 어디 인구유출의 거대한 흐름을 제대로 막아낼 의지와 뾰족한 수단 같은 게 있기나 할까?

가뜩이나 추락하는 지역경제 속에서 세수가 많이 걷힐 리가 만무하므로, 없는 살림 쥐어짜서 청년들이 하루라도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각종 청년정책들을 발표하는 그 모습들은 가상하다. 비록 그것들이 모두 서울, 경기, 인천에서 비슷한 정책들을 이미 예전부터 정착해 놓았거나 더 파격적이긴 하지만 돈무한복사버그를 쓸 수도 없는 마당에 그것까지 욕심내지는 않겠다.

다만 부산의 지자체들이 내놓는 청년 정책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가령, 작년 5월에 미혼 청년들을 대규모로 모아놓고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해운대 랑데부’를 기획한 해운대구의 구닥다리 사고회로와, 젊은 남녀가 커플이 되면 100만 원씩 지급하겠다던 사하구의 납작한 발상은 이제 우습지도 않다.

더 놀라운 것은 부산시가 정말 파격적인 정책이라며 자랑스럽게 내놓은 정책을 얼마 전에 발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것에 집중했다. 전국적으로 결혼에 관한 기본적인 가치관이 달라진 시대의 흐름에 도태된 것은 둘째치고, 현실적으로 결혼과 출산 자체는 고려대상에 넣을래야 넣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그냥 한 명만 낳아도 뭘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서너 명을 낳아야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겠다는 발상은 황당함을 넘어 아주 신선했다. 이 모든 상황이 한 편의 영화였다면 이들 작품은 왓챠에서 로튼토마토 지수 100%를 받았을 것이다.

일자리 문제만 지적해서 될 게 아니다.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로 한 것은 연애, 결혼, 자녀계획 따위가 아니다. 이들 중 모든 이들이 결혼을 선택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제라도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중 받아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아직 부산의 많은 중장년층 이상의 시민들과 정치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래, 평생 그렇게 하시라.

삶의 형태는 물론이고, 문화적인 측면 또한 고려해야 한다. 비록 서울의 문화 인프라 규모를 무조건적으로 비교하고 따라갈 수는 없다. 2500만 수도권 인구를 견인하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압축도시와 많아봐야 800만 넘길까 말까 하는 부울경에 ‘부’가 딱히 서울 만큼의 중추도시 역할을 수행하지도 않는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수도권은 일자리, 문화, 거주 문제 등을 주변 지역들끼리 부족한 점들을 서로 채워주는 식으로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서울에 출퇴근 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은 상당수 경기, 인천에 거주한다. 그 유명한 ‘경기도민’들이다. 서울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열리는 다양한 박람회나 전시회 등은 거리가 좀 있더라도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도로와 대중교통 인프라 덕분에 손쉽게 방문할 수 있다.

부울경은 어떠한가? 부산 사람들은 서울과 다르게 직장을 부산이 아닌 인근 지역에 두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대중교통이 잘 닿지 않는 중소도시의 공업단지이며, 따라서 많은 이들이 자차나 통근버스 없이는 출퇴근이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초년생들은 대부분 자차를 갖고 있지 않으며, 모두가 운전면허를 딸 줄 아는 것도 아니다. 통근버스를 운행하는 회사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당연히 선택지가 좁아진다.

물론 경기도민들이 서울까지 왕복 4시간을 지옥철 속의 한 줄기 콩나물이 되어 집에 가면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는 걸 부러워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수도권처럼 대중교통이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소를 하고 있었더라면 상황은 조금 나았을지 모른다. 부산에는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의 ‘주안국가산업단지역’이나 수인분당선의 ‘남동인더스파크역’과 같이 공업단지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그다지 많지 않다. 부산 도시철도 5호선의 2단계 사업은 여전히 계획 단계에 있는 데다가 1단계 구간이 공사 중 싱크홀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상황을 놓고 봤을 때 그다지 기대할 것이 없다.

만약 부산이 주변 도시들과 진작에 광역전철로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KTX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곳의 인프라가 더 많이 갖춰져 있었다면, 매일매일 과도한 인파 속에 지친 서울 사람들이 더 손쉽고 빠르게 부산을 다녀갈 방법을 얻게 된지 20년이 지났지만 정작 이곳에 살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왜 반대로 부산 사람들만 서울을 향하고 있는가? 그 물음의 정답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 많은 이유들을 한 단어로 함축하면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다.

부산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않고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인간성을 말살시켜 성장만을 고집하던 야만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이곳 기득권자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들이 바뀌기를 소망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곳에 아득바득 떠나지 않고 평생 버티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연명을 도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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