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잠기는 공간

생각의 강에 댐을 쌓지 말자. 바다와 만나는 길을 막지 마라.


회피형 속죄

여기, 언제나 무표정한 사람이 있다.
그는 솔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모난 양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좋거나 싫은 것을 스스로 말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겪어도 꾹 참았다.
가까운 이들로부터 그런 일을 하면 더 많이 견뎌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있더라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다고 새로운 취미를 탐구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익숙한 몇 가지의 일들만 붙들며 살았다.

그는 주변의 눈치만 보며 살아왔다.
이웃에게 입은 상처조차 “그럴 의도가 아니겠지” 하고 먼저 용서했다.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마음 속 양동이를 채워가던 분노는
그가 중심을 잃으며 넘쳐버렸다.

그렇게 그는 가까운 이들을 잃었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오로지 자신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게 되었다.

훗날, 그에게 다른 이들이 곁에 다가왔다.
죄책감으로 움츠리던 그에게 이들의 손길은
고립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였다.
말과 행동, 그 어떤 것이든 거슬리게 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들로부터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마음 한 구석에 떠올렸지만, 외면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철저히 외면했다.
실낱 같은 가능성을 믿어보려 애썼다.

그는 하물며 그 의심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과거를 속죄하는 일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먼 훗날 이들로부터 벗어났지만
한때 내면의 의심을 억지로 외면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스스로 원망하기에도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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